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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백사마을 산수유 군락지 포토존. |
예쁜 봄 마뜩잖아 3월이 다 가도록 마지막 남은 한기를 마구 쏟아내니. 그래 봐야 뭐하나. 심술궂은 시샘도 아랑곳하지 않고 겨우내 가지 끝에 잘 매달린 새빨간 열매 위로 아주 작고 노란 꽃 활짝 폈다.
산허리를 온통 봄의 색으로 칠한 이천 산수유마을. 함박눈 펑펑 쏟아내며 요란법석 떨던 먹구름 물러가고 따뜻한 햇살 비추자 노랑은 더 화사하다.
그 꽃 사이로 걸어가니 살랑거리는 봄바람 따라 메말랐던 사내 가슴에도 예쁜 꽃 한 송이 살짝 기지개를 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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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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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창환 기자 |
겨울은 참 샘이 많다.
오죽하면 ‘꽃샘추위’라는 단어까지 생겨났을까. 봄의 전령사 매화, 산수유 피기 시작하는 3월 말이면 어김없이 늦추위가 옷깃을 여미게 만든다.
지난달 28~30일 이천백사 산수유꽃축제가 열린 경기 이천시 백사면 도립리 산수유마을도 사흘 내내 한겨울 같았다.
낮 최고기온이 섭씨 10도 밑으로 떨어지고 강한 바람까지 부는 통에 꽃놀이와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패딩을 입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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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마을 입구 포토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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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백사 산수유꽃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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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한과. |
산수유 군락지 가는 길 입구부터 노란 꽃 흐드러져 가슴속으로 봄 내음 마구 파고든다.
‘안녕 산수유마을’이 적힌 포토존을 지나자 장터가 열려 시끌벅적했다.
추억의 꽝 없는 뽑기를 시작으로 영준이네 뻥튀기 아이스크림, 정숙이네 산수유 막걸리 등 마을 주민가게 좌판이 늘어섰다.
메밀칩, 참마죽, 무농약 생표고버섯, 뽕나무 느타리버섯 등 평소 보기 힘든 신기한 먹거리들 때문에 산수유 군락지로 가는 발걸음이 점점 느려진다.
결국 고소한 냄새 흘러나오는 주민가게 산수유한과에서 발이 묶였다.
즉석에서 방금 만들어 온기가 넘치는 산수유 한과는 촉촉하면서 새콤달콤해 입에서 사르르 녹는다.
주인장이 축제 때 딱 3일만 만든다고 귀띔하니 지갑을 열 수밖에. 만원에 한 봉지 가득 넣어주는 한과 한 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시식용 한과 한 움큼 쥐고 다시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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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괴정 느티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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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괴정. |
한눈에도 고풍스러운 사당 앞 느티나무들이 예사롭지 않은데 600살이 훌쩍 넘은 고목이다.
육괴정에 얽힌 사연이 전해진다.
조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때 조광조를 중심으로 이상정치(세계)를 추구하던 신진사류들이 크게 몰락하자 난을 피해 낙향한 남당 엄용순이 작은 정자를 만들었다.
동네 선비인 엄용순과 김안국, 강은, 오경, 임내신, 성담령 여섯 명이 날마다 정자에 모여 학문을 논하고 풍류를 즐겼다.
이들은 정자 앞에 연못 ‘남당’을 파고 그 주위에 각자 느티나무 한 그루씩 심었다.
여섯 그루 중 세 그루는 고사하고 나머지 세 그루가 산수유마을을 지키고 있다.
단순한 정자로 지은 육괴정은 증축을 거쳐 현재는 사당이 됐다.
육괴정으로 들어서자 색 바랜 처마에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내부에는 임진왜란 당시 순절한 엄용순 손자 엄유윤의 충신정문 등 현액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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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괴장 연못 남당. |
조선시대 사대부의 연못은 대부분 네모난 형태이고 남당도 원래 사각형이었다.
하지만 연못 개보수 과정에서 현재의 둥근 형태로 잘못 복원됐다는 주장이다.
‘남당의 올바른 복원을 바라는 백사문화해설사 일동’이 호소문을 내걸었다.
문제가 있다면 고증을 통해 제대로 복원되기를 기대해 본다.
선비들은 또 하나 아주 중요한 일을 했는데 바로 마을에 심은 산수유다.
작은 묘목은 수백년이 지나면서 백사면 송말리, 도립리, 경사리, 조읍리 등 원적산 기슭으로 퍼져 지금의 산수유마을을 만들었다.
산수유 꽃말은 우정과 사랑. 여섯 남자의 우정이 후대에 근사한 유산을 선사했으니 참 잘 어울리는 꽃말이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산수유를 ‘선비꽃’으로 부른다.
산수유마을에는 100년 수령의 산수유나무 1만7000여 그루가 군락지를 이뤘고 가장 나이 많은 산수유나무는 500살이 넘은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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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군락지 돌담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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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군락지 매화. |
오랜만에 찾은 산수유마을에는 돌담길이 생겨 더 정겨워졌다.
거리는 짧지만 허리 높이 돌담이 운치 있게 휘어지는 오솔길 따라 산수유나무가 터널을 이뤄 대충 찍어도 화보가 된다.
산수유 군락지 입구에는 매화도 활짝 피었다.
구름 잔뜩 낀 흐린 날이지만 하얀 매화, 노란 산수유가 어우러지니 연인들은 예쁜 사진 얻기 바쁘다.
그런데 갑자기 찬바람이 강하게 불더니 꽃송이가 이리저리 흩날린다.
아니다.
자세히 보니 눈송이다.
금세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아예 함박눈으로 바뀌어 펑펑 쏟아진다.
“뭐야 3월 말에 웬 눈이 이렇게 쏟아지지?” 여행자들은 황당해하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표정이다.
활짝 핀 산수유꽃과 눈꽃이 어우러지는 신비한 풍경을 앞다퉈 영상으로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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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군락지. |
한 20여분 퍼붓던 눈이 거짓말처럼 그치고 먹구름은 온데간데없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둥실 떠가고 애타게 기다리던 따뜻한 봄 햇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그제야 움츠렸던 산수유 노란색도 활짝 기지개를 켜 여행자를 반기니 더 짙고 예쁜 색으로 찬란하게 빛난다.
그래, 비 온 뒤 태양이 뜨는 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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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군락지 포토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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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군락지 포토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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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군락지 포토존. |
다만 산수유는 공해에 약하다.
이곳은 산수유가 군락을 이룬 것을 보니 마을 공기가 참 깨끗한 것 같다.
깊이 숨을 들이마셔 폐속을 봄의 공기로 가득 채운다.
산수유 군락지 안으로 끝까지 들어가면 그네가 보인다.
높이 약 5m 그네에는 아이들이 꽃보다 더 맑게 깔깔대고 웃으며 하늘을 붕붕 날아다닌다.
군락지 곳곳에선 예쁜 포토존도 만난다.
‘행복한 날에’ ‘꽃도 웃고’ ‘당신도 웃고’ ‘꽃길만 걷길’ 등등 듣기만 해도 기분 좋은 언어에 가슴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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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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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룡송. |
백사면 여행은 신기한 나무들을 찾아가는 여행이기도 하다.
산수유꽃축제 행사장에서 차로 5분 거리에서 반룡송(蟠龍松)이 기다린다.
논밭 한가운데 자리 잡은 소나무 자태는 매우 독특하다.
멀리서는 소나무 군락으로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키가 4.25m 되는 소나무 한 그루다.
지상 2m 정도에서 사방으로 가지를 펼쳐 마치 군락처럼 보인다.
밑에서 보면 더 신기하다.
가지들이 마치 용이 꿈틀대는 것처럼 비틀어지고 엉키며 뻗어 나갔다.
더구나 표피가 마치 용 비늘처럼 붉은색이어서 반룡송이란 이름을 얻었다.
이는 ‘하늘에 오르기 전 땅에 서리고 있는 용’이라는 뜻이다.
마을에는 반룡송을 훼손하면 화를 입는다거나 나무의 껍질을 벗긴 사람이 병으로 죽었다는 등의 다양한 얘기가 전해진다.
반룡송은 신라 말기 승려 도선이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장차 난세를 구할 큰 인물이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함흥, 서울, 강원, 충남 계룡산과 백사면에 반룡송을 한 그루씩 심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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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사 갈산리 석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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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사 은행나무. |
영원사는 사찰이라기보다는 잘 꾸민 정원 같다.
가장 아래층에 파란 하늘을 담는 넓은 연못이 놓였고 알록달록 예쁜 꽃들을 심은 중간층 화단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원적산 자락에 살포시 안겨 있다.
중간층에 놓인 독특한 모양의 갈산리 석불입상이 눈길을 끈다.
이천시 일대에 분포하는 다른 석불입상보다 몸이 호리호리하며 둥근 얼굴과 인자한 미소가 마음을 푸근하게 만든다.
폐사된 미륵사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갈산동과 안흥동 경계지점 도로변에서 발견된 석불은 원래 두 부분으로 나뉘어 허리 부분에서 연결하는 구조였다.
발견 당시에는 머리, 가슴, 허리 아래로 분리돼 뒹굴고 있었는데 고증을 거쳐 복원돼 영원사에서 다시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
영원사 은행나무는 높이 25m, 둘레 4.5m이며 820살을 넘겼는데도 아주 건강하다.
대단하다.
천년 가까이 무성한 잎을 피우는 나무라니. 잎이 노랗게 물드는 늦가을에 꼭 다시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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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리 백송. |
백송은 서울 통의동, 원효로, 재동, 수송동, 밀양, 보은, 예산 등 우리나라에 10그루 정도만 있는 아주 희귀한 소나무로 중국 북부가 원산지다.
신대리 백송은 높이 16m로 밑동에서부터 두 개로 갈라지며 하늘로 솟은 뒤 우산처럼 가지를 펼쳤다.
백송은 한때 껍질을 약재로 쓸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몰지각한 이들이 몰래 껍질을 벗겨가는 수난을 겪었다.
전라감사를 지낸 민달용의 묘를 이곳에 안치한 후손들이 묘 앞에 백송을 심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이천=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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