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내 터놓지 않는 우리네 부모
자신의 권리 당당히 요구하는
‘교활한 아버지’ 문득 떠올라
야오어메이 ‘교활한 아버지’(‘한·중 걸작 단편선’에 수록, 자음과모음)
지금은 아니지만, 예전에는 부모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 사람하곤 친해지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을 텐데. 그 사정이라는 것이 나에게도 있어서 어쩌면 나는 상대방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작은 욕망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같이 살아도 부모의 속내를 좀처럼 알 길이 없어서 어느 때는 무엇을 원하는지, 요구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자식에게 좀 터놓고 말해주었으면 하는 때가 있다.
‘가정의 달’이라 외식 한번 하자는데도 큰돈이 드니 그럴 필요 없다고 완강히 손사래 치는 부모 등을 떠밀다시피 해 식당에 갔는데 막상 동생 부부와 손주를 보시더니 너무도 환하게 웃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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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경란 소설가 |
슬픔에도 가벼움과 유머가 깃들 수 있는지. 아무튼 이 아버지 캐릭터, 한번 읽으면 잊을 수 없긴 하다.
어느 날 “아버지가 눈처럼 새하얀 차림으로 예고도 없이 우리 집에 나타났다.
” 인견으로 만든 흰옷을 신선처럼 빼입고. 나는 삼 형제 중 맏이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삼 년이 지난 때였다.
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명절이나 생일에 가족이 모두 모여 왁자지껄하게 음식을 먹던 원형 식탁과 아버지의 안정감과 귀속감까지 다 가져가 버린 것 같았다.
그간 아버지를 찾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 첫 기일에 집에 갔더니 영정이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자식들에게 아버지는 ‘너희들은 집에 잘 걸어놓았지?’라고 주눅 들지 않고 묻는 데다 식사를 부탁했다며 낯선 여자를 소개했다.
그날 아버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대학 교육까지 시켰으니 이제 매달 부양비를 보내야 하며 자신에겐 남은 인생을 계획할 권리가 있으니 간섭하지 말라고. 아버지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러나 맏이인 나도, 형제들도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가 내 집에 나타나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물가 상승에 관한 이야기도. 내가 미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아버지는 애처로우면서도 비난하는 듯한 눈빛으로 불쑥 묻는다.
“너희 월급이 다 올랐으니 내 월급도 좀 올라야 되지 않겠니?” 세대 간의 입장 차이로 동생들은 반발했으나 아버지는 그날 목적을 달성하고 유유히 돌아갔다.
그 이후로도 전화나 생일 카드 등으로 아버지는 부양비 인상을 원했고 한 번은 이유도 말하지 않곤 목돈을 요구했다.
나는 “돈을 요구하던 아버지의 기교, 그 강경함과 냉정함, 위엄에 감탄했다.
” 체면을 지키는 동시에 존엄을 잃지 않았던 아버지에게.
내내 지켜왔던 집을 빈털터리가 된 둘째 아들에게 내주고 낙향해 살던 아버지가 아들들을 불렀다.
오랜만에 같이 명절을 보내자면서. 자식들 눈에는 아버지 옆에 또 집을 목적으로 곁에 있는 것 같은 낯선 여성이 있었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병을 숨겨왔다.
간병을 잘하는 구 씨의 목적도 집 명의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사람이었고. 아버지는 아들들 들으라는 듯 구 씨 손을 잡고 말했다.
당신은 정말 착한 사람이니 혼자 남아 힘들어지면 누군가 도와주러 올 거라고. 아버지와 자식들이 화해 비슷한 것을 했을 때는 임종 직전이었다.
아버지 정신이 잠깐 돌아왔을 때 나는 맏이로서 6개월 동안이나 아버지를 보살펴준 구 씨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가 한 대답! 그것이 이 단편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아버지의 ‘교활함’은 어떠한가. 다 키워놓았으니 이제 자신의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곤 아들들에게 원하는 바를 요구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아버지. 기어코 목적을 달성했던 강경함과 종국엔 마지막 큰 걱정거리를 숨기는 교활함. 좋은 소설은 이런 두 개의 축을 가진 듯하다.
현실과 윤리.
아주 가끔은, 자식 걱정 돈 걱정 안 하고 그저 당신들만을 위한 요구와 욕구를 부모에게 직접 들어보고 싶을 때가 있다.
자식을 위한다며 뭔가 숨기는 게 있을까 봐 두렵기도 하면서.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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