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명 헌신으로 지킨 서해, 이젠 우리가 지킬 바다다 [박수찬의 軍]세계일보 기사제공: 2025-03-28 09:44:30

서해. 중국에선 황해(黃海)라 부르는 한반도의 서쪽 바다.
중국과 북한, 한국에 둘러싸여 있는 서해는 예전부터 자유로운 왕래가 이뤄졌던 ‘해상 실크로드’의 일부였다.

냉전 이후 국내 일각에서 한국과 중국을 서해 항로로 연결해 경제 협력을 활성화하자는 ‘환황해 경제권’이 거론된 것도 이같은 역사의 연장선이었다.

지난 21일 서울 중구 서울광장 꿈새김판에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사건 55용사를 추모하는 글귀가 적혀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서해는 교류보다는 분쟁의 성격이 두드러졌다.
남북은 북방한계선(NLL)을 사이에 두고 충돌을 거듭했다.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 등이 벌어지면서 55명의 장병이 희생했다.

중국은 배타적경제수역(EEZ) 획정이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서해에 구조물을 설치하는 등 서해를 내해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해가 분쟁의 바다로 변하는 징후가 뚜렷해지는 대목이다.

◆NLL서 위협 증가 우려

북한은 1953년 NLL 설정 이후 일관성 없고 사실을 왜곡하는 황당한 주장도 서슴지 않으며 NLL을 부정해왔다.

북한이 지난 1959년 조선중앙통신사 명의로 발간한 ‘조선중앙연감’에는 서해 NLL이 군사분계선으로 표기되어 있다.
NLL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입장과는 다른 증거다.

북한은 이를 궤변과 변명으로 만회했다.
지난 2006년 5월 제4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당시 북측 대표로 나온 김영철은 연감을 만든 출판사가 표기를 잘못해서 인민들의 항의를 받고 출판사가 없어졌다고 우긴 것이다.

제15주기 천안함 46용사 추모식이 거행된 지난 26일 경기 평택시 해군 제2함대사령부에서 유가족이 추모비에 새겨진 부조물을 어루만지고 있다. 평택=뉴시스

공식 회담에서 궤변을 늘어놓을 만큼 북한의 NLL 무력화에 대한 의지가 크다는 뜻이다.

곡창지대이자 황해제철연합기업소 등 주요 산업시설이 있는 황해도의 물류를 위해선 해주항을 이용해야 하는데, NLL에 막힌 것이다.
북한으로선 NLL을 무력화할 필요가 있는 셈이다.

북한은 서해 NLL 일대에서 1·2차 연평해전, 대청해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전을 감행했다.
포사격 훈련이나 우리측 초계함에 대한 위협 등까지 포함하면 2000년을 전후로 고강도 도발이 지속됐던 셈이다.

‘적대적 두 국가’를 선언하며 남북 연결로를 차단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지난해 1월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에서 “우리 국가의 남쪽 국경선이 명백히 그어진 이상 불법 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영공·영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 도발”이라고 말했다.

해상 경계선, 해상 분계선, 해상 경비계선 등의 용어를 썼던 과거와 달리 국경선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NLL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정치적 의도를 더욱 뚜렷하게 밝힌 셈이다.

북한의 신형 호위함에서 순항미사일이 발사되고 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이는 북한의 핵무기 개발과도 맞물려 있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력에 맞서 북한은 핵무기 개발에 국력을 쏟았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과 전술핵까지 개발하면서 핵을 사용한 전략적 억제력과 전쟁 수행 능력을 함께 갖춘 모양새다.

핵개발에 성공하면 전면전 위험은 감소하나 국지적 충돌은 증가한다.
안정-불안정의 역설(stability-instability paradox)로 불리는 국제정치학계의 논리다.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과 이란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북한도 이와 비슷하다.
자신도 핵을 가졌으니 한·미도 전면전을 벌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면, 재래식 도발을 훨씬 쉽게 생각하게 된다.
NLL을 ‘불법 무법 경계선’이라면서 용납하지 않겠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도 핵을 믿기 때문이란 지적이다.

국지도발을 진행하려면 그에 필요한 재래식 전력을 갖춰야 한다.
신형 근거리탄도미사일(CRBM)와 자주포, 전차, 장갑차를 개발한 북한이 해군력 강화에도 눈을 돌리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화살-2형 순항미사일과 대함미사일 등을 탑재한 1500t급 호위함 2척을 건조, 동해와 서해함대에 각각 배치했다.
이보다 더 큰 호위함을 만드는 모습과 신형 대함미사일 시험사격도 공개했다.
수중에서 1000㎞를 이동, 핵을 터뜨린다는 핵무인수중공격정 해일-2의 위력도 과시했다.

북한의 신형 지대함미사일이 가상 표적을 향해 발사되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옛소련의 구식 장비와 지상군용 포를 개조해서 썼던 과거의 북한 해군과는 달라진 모양새다.

이는 핵무기에 매달리던 김정일 체제와는 다르다.
전략적 억제력을 갖췄으니, 한국에 대한 실전 능력을 효율화하는데 힘을 쏟을 수 있을 정도로 투자를 할 여력이 있고, NLL을 포함한 한반도 일대 해상에서 한국 해군과 교전할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의미다.

지금은 북한의 도발이 뜸해졌다.
합동참모본부가 27일 공개한 북한 동향에 따르면, 서북도서 해역에서 북한군은 통상적인 경비정 활동, 해안포 진지 점령과 우리 군에 대한 감시활동을 펼치고 있다.
특이한 움직임은 식별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북한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NLL은 언제든 분쟁의 현장으로 바뀔 위험이 있다.
서북도서와 더불어 서해 일대 항로와 하늘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다.

◆서해, 미·중 갈등 최전선 될 수도

북한의 위협과 더불어 서해를 위협하는 또다른 요인은 중국이다.
중국은 냉전 이후 해군력 확장을 추구하면서 해상 활동 영역을 넓혀왔다.
대륙국가에서 해양국가로 변신하는 셈이다.

문제는 중국의 행보다.
미국을 비롯한 전통적 의미의 해양국가는 해양법 등 규칙에 의한 자유롭고 열린 항해를 추구한다.
반면 중국은 바다를 육지처럼 선을 긋고 점령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만리장성을 바다에 옮겨놓은 모양새다.

중국 해경선들이 공해상에 정박해 있다. 신화연합뉴스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반발에도 남중국해에 9단선을 설정하고 인공섬을 만들어 요새화하는 것도 이와 유사하다.
남중국해를 중국의 내해처럼 만들겠다는 의도를 드러낸 셈이다.

서해에서도 마찬가지다.
중국은 한국과의 해상 경계선이 동경 124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난 2013년 한국 해군참모총장이 중국 해군사령원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 해군사령원은 한국 군함이 124도를 넘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24도를 기준으로 경계선을 획정하면, 서해의 70%는 중국이 차지한다.
이는 뤼순과 칭다오 등 중국 서해 북부 연안 기지에 있는 중국 북해함대가 대만 해협과 태평양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결과로 이어진다.
서해가 사실상 중국의 바다가 되는 셈이다.

한국은 한반도 연안으로 밀려난다.
무역의 99%를 해상에 의존하는 한국의 해군이 서해에서 연안으로 밀려나면, 경제와 안보는 치명적 위협을 받는다.

중국은 지난 2018년부터 서해에 다수의 부표를 띄웠다.
백령도 서쪽 해상부터 이어도 남서쪽 해역에 이르는 서해 전역에 10여개가 설치됐다.

최근엔 한중 잠정조치수역에서 중국이 만든 구조물이 발견됐다.
중국은 지난해 4∼5월쯤 구조물 2기를 설치하고, 올해 초에도 1개를 추가 설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해군 호위함이 항구를 떠나고 있다. 신화·연합뉴스

주한중국대사관은 해당 구조물이 심해 어업 양식 시설로 중국 근해에 있다고 주장한다.

서해는 한국과 중국의 배타적경제수역(EEZ) 경계선이 획정되지 않은 상태다.
양국의 해양경계획정 협상이 타결되지 않자 2000년 한중어업협정을 체결, 서해 중간에 양국간 EEZ가 겹치는 수역의 일부에 잠정조치수역을 정했다.
양국이 모두 어업활동을 할 수 있다.

다만 중국이 무단으로 구조물을 설치하고, 우리 정부의 조사마저 가로막으면서 중국이 서해 경계선을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려는 것이라는 의혹이 커지고 있다.

정부는 지난달 26일 해양수산부 산하 한국해양과학기술원 해양조사선 온누리호를 보내 점검을 시도했지만, 중국 해경과 민간인에 저지당했다.

부표와 구조물이 늘어나는 것은 중국 선박과 해경 순시선, 해군 함정의 서해 잠정조치수역 진입을 일상화하는 효과가 있다.
선박 출입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면, 해경이나 해군의 관할권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지난 25일 서해 중부 해상에서 실시된 해상기동훈련에서 충남함(FFG-Ⅲ, 3600t)이 실사격 훈련을 하고 있다. 해군 제공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이 식민지를 넓히듯 서해의 통제권을 조금씩 넓혀가면, 서해는 중국의 내해가 될 수 있다.
중국이 해명을 했지만, 여전히 의혹어린 시선이 남아있는 대목이다.

이같은 위협에 대응하려면 전력 보강이 필요하다.
하지만 군함 건조는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된다.

함대사령부나 작전사령부 차원에서 활용할 중고도 해상초계용 무인정찰기(MUAV)나 대함 탄도미사일 등의 비대칭 전력을 확보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 해군은 1953년 정전협정 직후 70여년에 걸쳐 NLL을 지켜왔다.
서해 중부 해상과 인천항을 오가는 선박들이 북한 위협에서 자유로운 것은 NLL과 서북도서를 지킨 해군과 해병대 덕분이다.


그러나 서해를 둘러싼 환경은 예전보다 더욱 악화했다.
해군은 북한과 중국 위협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동해와 남해로 전력이 분산된 현재의 한국 해군으로선 쉽지 않은 일이다.

서해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한층 고조되는 지금, 우리 사회 전반에서 한반도 해양안보를 더욱 치열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북한 외에도 서해를 위협하는 다양한 요소를 함께 살피고 대비해야 한다.
그것이 55명의 헌신을 헛되이 하지 않는 길이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