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서울 당곡고등학교 4층 '설렘 on실'. 학생들은 교과서 대신 '노트북'과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네모난 책상이 일렬로 놓인 보통의 교실과 달리, 널찍한 테이블에는 6명의 학생이 모둠 형식으로 둘러앉아 선생님의 설명에 따라 노트북을 조작했다.
"칠면조 한 마리 주세요"라는 입력어를 넣자 유창한 외국어로 번역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날 수업은 고교학점제로 선택해 들을 수 있는 '스마트콘텐츠 실무' 과목으로, 외국어 번역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만들어보는 과정이다.
'공유캠퍼스'로 묶인 인근 수도여자고등학교 학생들도 원격으로 수업을 들었다.
화상 프로그램으로 선생님이 질문하자 화면 속 수도여고 학생들은 이해했다는 의미로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서울시교육청은 27일 올해 전국 고등학교에 전면 도입된 고교학점제 학교 현장을 찾아 운영 현황을 살피고 교육청의 지원 사항을 점검했다.
고교학점제는 기존의 교육과정과 다르게 '학점 기반 선택 중심' 교육과정을 운영한다.
고등학교 1학년 시기에는 공통과목을 중심으로 수강하되, 2~3학년은 선택과목을 중심으로 운영된다.
본인의 진로에 따라 학기에 정해진 학점에 맞게 선택과목을 신청해 들을 수 있다.
이를 위해 1학년 시기에 진로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도과정이 뒤따른다.
소속 학교에서 개설되지 못한 과목은 거점학교나 공유캠퍼스를 통해 다른 학교에서 이수할 수 있다.
당곡고와 수도여고, 신림고는 공유캠퍼스를 통해 세계문제와 미래사회, 스페인어, 스마트콘텐츠 실무 등 특색 과목을 공유하고 있다.
스마트콘텐츠 실무 수업을 듣는 2학년 신지민 양(16)은 "고교학점제가 아니었다면 그저 '선생님'이 꿈이라고 말했을 텐데, 고교학점제를 통해 다양한 융합 수업을 듣다 보니 '디지털 교육자'라고 꿈을 얘기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신 양은 문·이과 전반을 다루는 진로에 맞게 탐구 영역도 사회탐구·과학탐구 1개씩, 공유캠퍼스 과목으로도 '세계문제와 미래사회'를 선택했다.
같은 수업을 듣는 김병민 군(16) 또한 "꿈이 앱 개발자"라며 "진로에 따라 수학은 기하, 과학탐구는 물리를 선택했고 스마트콘텐츠 실무 수업도 듣는다"고 전했다.
출결 기준만 채우면 졸업할 수 있던 과거와 달리 고교학점제하에서는 최저 성취 수준인 '학업성취율 40%'를 채워야 학점을 이수할 수 있다.
이렇게 3년간 192학점 이상을 취득하면 졸업이 가능하다.
올해는 이 '최저 성취 수준'이 고등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본격 적용된다.
학업성취율 40% 기준은 기본적으로 교육당국의 가이드라인과 담당 교과 교사의 판단에 따른다.
김현준 당곡고 교감은 "교육청 가이드라인 안에서 선생님들이 자신의 교과 재량, 전문성을 충분히 살려서 처리하고 있다"고 했다.
이에 따라 학교는 학생들이 기준을 채울 수 있도록 '최소 성취 수준 보장제도'를 운영한다.
기준 미도달 예상 학생을 미리 파악하고, 학기 중이나 방학 기간에 보충 지도한다.
배덕기 당곡고 교사는 "고교학점제의 핵심은 포기하는 학생들이 한 명도 없도록 모두 같이 가자는 것"이라며 "이전에는 (학생들이) 자더라도 수업을 진행하고 끝났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다만 시행 초기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신 양은 "공유캠퍼스 수업을 신청할 때 수도여고로 가서 (대면으로) 듣는 시간이 있는 줄 알았는데, 대면으로는 수행평가만 하고 오기 때문에 직접 참여하는 것은 5분가량의 발표뿐이었다.
그런 점은 살짝 아쉽다"고 토로했다.
온라인 수업에 대해서도 "수업을 들을 때 보통 졸지 않으려고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과 대화하면서 듣는데, 온라인 공유캠퍼스 수업은 그렇게 하지 못한다"며 "이어폰을 끼고 그냥 듣기만 하는 학생도 있어서 자기 주도가 제대로 안 되는 친구가 있다면 어려움이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선희 수도여고 교감은 수요에 맞게 교원을 채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교원 인사발령 주기(1년)와 고교학점제의 학기 단위가 맞물리지도 않고, 수강 신청 때마다 어떤 과목에 초과 수요가 발생할지도 미리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교감은 "특정 교과에 선택과목, 공통과목이 몰릴 경우 미술 선생님은 2명인데, 3명에 준하는 수업 시수가 발생한다"며 "1년 단위로 교과가 운영되면 교원을 한 분 더 모시면 되는데 학기당 수업을 운영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시간강사 등을 투입하게 된다"고 말했다.
초기 시스템 정비에서 교사의 행정 업무도 늘었다는 평가다.
정병희 교사는 "출석 체크 등 여러 행정적인 부분에서 고교학점제가 전면 적용된 1학년과 2학년이 달라 시행착오가 많다"며 "시스템적으로 학교의 상황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교사들이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상태"라고 전했다.
김영원 기자 forever@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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