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커지는 기업외교]②삼성·SK·현대차·LG·포스코, 美로비스트 159명 고용…7년 전 2배아시아경제 기사제공: 2025-03-18 07:01:00

<i>#. 삼성전자는 미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첨단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면서 반도체지원법(CSA)에 따른 보조금을 받기 위해 '물밑 로비'에 나섰다.
그룹 차원에서 2024년 한 해 지출한 로비액만 698만달러(100억3000만원)에 달한다.
글로벌 대관 업무를 총괄하는 GPA(Global Public Affairs)가 발 빠르게 움직이는 한편, 커빙턴 앤 벌링(Covington & Burling LLP)이라는 다국적 로펌도 가세했다.
각국 정부 및 국제기구를 상대로 한 로비(lobbying)가 특기다.

<i>#. 현대차그룹은 K&L 게이츠(K&L Gates LLP), 머큐리(Mercury Public Affairs) 등 명성이 자자한 로펌(로비업체)을 고용했다.
미 행정부의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특히 대규모 투자를 집행한 조지아주 출신 의원들을 적극 공략했다.
버디 카터 하원 의원(공화당)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현대차를 배제한 IRA 법안을 비판했고, 라파엘 워녹 상원 의원(민주당)은 현대차도 보조금을 받도록 하는 IRA 수정법안을 발의했다.

10대 그룹이 조용한 외교전을 펼치는 기저에는 '첨병' 로비스트가 있다.
특히 미국 정부·의회·규제기관 출신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기업의 입장이 정책에 반영되도록 애쓰는 모습이다.
최근 5년간 북미 공략을 확대한 주요 기업들의 로비 금액만 1000억원을 넘길 정도다.

해외 대관조직을 별도 가동 중인 5대 그룹은 조직의 구성 등에 대해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한 대기업 임원은 "대관조직의 인력·규모·구성 등이 알려지면 경쟁사는 물론, 상대국 정부를 상대하는 데 있어 치명적일 수 있다"며 "반드시 대외비로 관리하는 사항"이라고 했다.
대신 로비스트 등록 현황을 통해 규모를 짐작해볼 수 있다.

18일 아시아경제는 미국 상원 로비 데이터베이스, 비영리기구 오픈시크릿 자료를 바탕으로 '5대 그룹'의 로비 활동을 분석했다.
삼성·SK·현대차·LG·포스코 등이 지난해 고용한 로비스트는 159명, 트럼프 1기가 출범했던 2017년 85명에서 갑절로 늘었다.

삼성전자가 64명으로 가장 많았고, 현대차가 40명으로 뒤를 이었다.
현대차는 4배를 넘길 만큼 증가 폭이 두드러졌다.
지난해 두 기업이 고용한 로비스트만 104명, 7년 전 5대 그룹의 로비스트를 다 합친 것보다 많았다.
우리나라 수출 최상위를 차지한 반도체·자동차 산업에 북미 시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반도체·배터리·에너지 사업을 전개하는 SK그룹도 이 기간 15명에서 31명으로, 로비스트 수를 크게 늘렸다.

눈여겨볼 지표는 리볼버(Revolver)의 수다.
리볼버는 로비스트 중에서도 정부와 민간을 오가는 '회전문 인사'다.
미국 정부·의회·규제기관 출신으로, 공직에서 물러난 뒤 기업에 고용된 로비스트를 뜻한다.
기업들이 고용한 로비스트 중 리볼버 비중이 늘었다는 건 그만큼 미국의 정책·규제 수립에 관여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가 커졌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2017년 로비스트 39명 중 32명이 리볼버였다.
지난해 들어 리볼버 수가 39명으로 늘면서 트럼프 1기 시절 전체 로비스트 수에 필적했다.
SK그룹도 로비스트 31명 중 20명이 리볼버다.
현대차는 2017년 리볼버가 8명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들어 23명까지 늘어났다.
현대차가 워싱턴사무소 부소장으로 영입한 로버트 후드 역시 리볼버다.
그가 트럼프 1기 국방부 차관보를 지낼 당시 역할은 국방부와 의회를 오가면서 관계를 조율하는 '대관 업무'였다.

로비 규모를 통해서도 기업들의 해외 대관 활동이 얼마나 공격적으로 전개됐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지출 금액에서 유의미한 지표를 보인 삼성·SK·현대차·한화 등 '빅(BIG) 4' 그룹을 중심으로 분석한 결과, 최근 5년간 이들 기업이 지출한 로비액은 1000억원에 육박했다.
특히 한화그룹은 북미 영업을 강화하면서 이 기간 로비액을 8배 가까이 늘린 것으로 확인됐다.

삼성그룹은 2020년 333만달러에서 지난해 698만달러(100억3000만원)로 지출을 늘리면서 기록을 경신했다.
SK그룹은 559만달러(80억3000만원)를 썼다.
SK이노베이션이 LG에너지솔루션과 배터리 영업비밀 침해 분쟁을 벌이던 2021년에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의 수입 금지 조치를 막으려 612만달러를 지출했었다.
당시보단 줄었지만, 전체적으로 증가세를 보인다.

지난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미국의 반도체 보조금 규모를 담판 지은 시점이기도 하다.
각각 47억4500만달러(6조8000억원)와 4억5800만달러(6600억원)를 받기로 했다.
그러나 반도체지원법과 해외 기업들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줄곧 비판해온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재집권한 만큼 실제 지급은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올해 역시 숨 가쁜 로비가 이뤄질 공산이 크다.

현대차그룹은 328만달러(47억1000만원)를 지출했다.
2022년 처음으로 200만달러를 돌파한 뒤 꾸준히 비슷한 규모의 예산을 투입하고 있다.
현대차의 로비 현안은 수소와 연료전지 정책, 전기차 인프라와 세제 혜택 정책, 환경보호청(EPA)의 배출가스 규제 등으로 나타났다.

가장 공격적으로 변모한 기업은 한화그룹이다.
2020년 로비액은 45만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해 391만달러(56억2000만원)를 신고하면서 현대차를 앞질렀다.
미 상원 보고서를 보면 태양광 패널 관세를 놓고 로비 활동을 벌였다.
5년 새 로비액 증가율은 769%에 육박한다.
최근 북미 방산시장 영업력을 강화하고 나선 만큼 더 치열한 로비 활동을 전개할 것으로 보인다.

주요 기업들의 지출이 급증한 배경은 미국의 정책 변화와 맞물려 있다.
반도체·전기차 등 핵심 수출 산업에서 미국 내 생산과 투자를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와 직결되는 방산 분야는 현지 정부를 설득하는 게 더욱 중요하다.
방산 업계 관계자는 "현지 조달 정책과 국방부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데, 장기적인 신뢰를 구축하는 게 핵심"이라고 했다.

다만 과도한 로비로 미국의 산업 정책에 종속되지 않도록 정부 차원의 지원사격도 확대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주미한국대사관 출신 외교관은 "과거 한국 기업들은 미국의 정책 변화에 사후 대응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젠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겠다는 전략"이라며 "주요 대기업이 글로벌 플레이어로 성장한 만큼 정부의 공동 대응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짚었다.